[류군의 잡담]코너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지만 할 상대가 없어 벽 보고 말하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항상 그렇듯 손 가는 대로 휴대 전화로 써 내려갑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나올 날을 꿈꾸면서 말이죠. 대만 및 중화권(중국, 홍콩, 마카오 등) 관련 사연이 있다면 주저 마시고 nowformosa@gmail.com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싱크탱크 퓨리서치센터가 실시한 지난해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87%가 중국을 싫어하며, 17년 연속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중국이 꼽혔다. 어찌보면 놀랍지 않은, 당연한 결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과거와 비교해보면 매우 대조적이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인 70%가 중국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1990년대 발생한 중국 천안문 사건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이 크게 바뀐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울러, 리덩휘 전 대만 총통의 행정부는 전폭적인 친일 노선을 걸으면서 일본인이 대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자국과 일본의 수교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올해는 일본과 대만이 단교 51주년이 되는 해이다. 50주년을 맞았단 지난해 대만 리덩휘 재단 및 싱크탱크는 이와 관련한 학술 포럼을 개최했다. 향후 반세기를 일본과 더 가까이 가자는 취지에서였다.
당시 일본 최고위 게스트로는 피격 암살된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가 목록에 오른 상태였고, 아베 전 총리의 대만 방문이 기정 사실화된 상태였다. 리덩휘 재단은 당초 포럼 개회사를 아베 전 총리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만일 아베 전 총리가 지금까지 상아있었다면 대만에서 반중을 외치는 그를 직접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은 1971년 유엔을 나간 대만과 1972년 9월 공식 관계를 끊고 중국과 함께 했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해가 1979년이었음을 감안하면, 우리나라는 이보다 훨씬 늦은 1992년 대만과 단교한 걸 감안하면 분명 일본은 가장 먼저 대만을 배신한 나라가 됨에는 자명하다.
중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되짚어보면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쉬원탕 중앙연구원 근다사 연구소 부연구원은 "일각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국교 수립이 서둘러 진행됐다고 본다"고 했다. 사료에 따르면, 일본과 중국의 수교는 미국의 허락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 미국은 당초 이를 알고 있었고 그 어떤 제지를 하지 않았다. 당시 닉슨 미 대통령은 일본 다나카 카쿠에이 일본 총리와 공동성명을 냈다. 일본이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데에 닉슨 전 대통령도 일본의 수교로 동아시아의 안정을 도모할 것이라고 했다.
쉬 부연구원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다른 국가에 대한 보상 및 전후 관련 문제를 검토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이전 국민'도 포함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이전 국민이라 함은 일본이 통치하던 대만을 포기하면서 대만에 살던 이들이 일본국민이었다가 중화민국 국민이 된 이들을 칭한다. 이들은 그 어떤 보상을 받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군으로 참전한 용사들에게는 연금과 급여, 보상금이 지급되었지만 대만에 있던 이들은 이를 받지 못했다. 대만인 1937년부터 1945년까지 12만6천 명이 비정규군으로 군에 몸 담았고 1942~1945년 특별지원군이라는 명분에으로 정식 군인이 된 이들은 8만 명 이상으로 20만 명 넘는 대만인이 일본군에 예속됐다. 그중 사망자는 3만 명 이상이다.
이로 말미암아 1987년 9월 일본 국회에서는 대만 거주민 전사자에 대한 위로금 지불 관련법이 통과되고 이어 1988년 이들에 대한 위로금 지급 시행령도 통과됐다. 그리고 1994년 원 일본군인에 대한 미지급금, 군사우체국저축, 해외저축금, 간이생명보험금, 우체국연금 등이 통과됐다. 일본이 대만인에 대해 빚이 있다고 인정한 사례다. 그럼에도 보상 금액은 대만 거주 옛 일본인들에게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전문 사진기사 황즈밍(黃子明)이 촬영한 대만 위안부 할머니 12명 |
전쟁 용사 말고도 위안부 문제도 있었다. 일본은 위안부 배상과 관련해 1995년 전문 단체인 아시아여성재단'을 설립했고, 2002년 5월 신청 종료일까지 7년에 걸쳐 대만인 13명이 신청했다. 우리 한국은 61명, 필리핀은 211명으로 알려졌다.
대만 위안부가 13명밖에 되지 않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약 2천 명으로 추산된다. 신청 인원이 13명에 불과했다는 것은 사회적 인식과 편견 등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수년 전 대만 위안부 취재 당시 대만에서는 재단에 보상 신청을 하는 것은 일본에 대한 혐오감을 조장하는 행위라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하여 일부는 위안부 보상 신청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차후 대만에서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당당하게 밝힌 사람은 53명에 달했다. 현재 대만에서 생존 중인 위안부 할머니는 1명뿐이다.
그러다 국민당 마잉주 전 총통 집정 시기인 2009년에 일본으로 인해 큰 이슈가 하나 터졌다. 바로 대만의 법적 지위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일본대만교류협회(구 교류협회) 대만사무소 대표였던 사이토 마사키가 국립중정대 세미나 축사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당시 이는 대만에 폭탄과 같은 발언이었다.
그는 "대만의 법적 지위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건 원래 국제적 합의였다. 하지만 마잉주 정부 외교부가 항의하며 사과를 요구했고, 이후 냉대를 받았다"고 했다.
이런 폭탄 발언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사이토 대표는 3년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1년 가량만 머물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체결 이후 대만의 지위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대만과 일본 관계는 우리나라와 대만이 사이가 틀어진 1990년대 들어서야 좋아졌다. 특히 1996년 리덩휘 총통 당선 후 급물살을 탔다.
동아시아 전문가 가와시마 마코토 도쿄대 교수에 따르면 리덩휘 전 총통은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와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키 등 두 사람을 대만으로 초청했다. 초청 이유인 즉 시바 료타로의 '대만 여행기'와 고바야시 요시키의 '대만설'이 일본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는 실제로 일본인의 70% 이상이 중국에 대해 호의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 덕분에 일본인의 대만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고 리 전 총통은 판단했다.
가와시마 교수는 이 사건을 두고 대만과 일본의 비정부 관계에서 중대한 변화라고 꼽았다. 이 일이 있기 직전 대만 민주화, 천안문 사건, 1996년 중국의 군사훈련으로 인한 대만해협의 위기 등이 발생했다. 이것들이 일본에서는 '중국위협론'으로 만들어졌다.
또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일본 대지진이 그것이다. 지진 발생 후 대규모의 피해를 입은 일본에 대만인들이 기부한 금액은 200억엔 이상에 달했다. 이는 일번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힘에 힘입어 일본 정계는 대만에 대한 보상 외교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중 일례로 2021년 일본이 무상으로 아스트라제네카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하면서 "대만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관찰자 입장으로서 이 둘간에 향후 또다른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이는 것은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인도태평양 전략 등이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 정세는 대만의 역할과 그 존재 자체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만은 안보 측면에서 중요성을 인정 받고 있다. 미일 동맹을 비롯해 자유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는 국가들의 지지가 최근 몇 년새 더욱 강해진 모양새다. 대만 차이잉원 정부도 이러한 기회를 틈타 대만을 지유민주주의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거듭나고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