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군의 역사훑기]는 [대만은 지금]을 구독하시는 독자님들을 위해 대만과 관련 있는 역사를 Q읽어 보실 수 있게 틈나는 대로 써 보고자 합니다. 정정 또는 건의 사항이 있으시면 nowformosa@gmail.com으로 이메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만은 지금 = 류정엽(柳大叔)]
대만은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넘어온 중국국민당에 의해 중화민국 정부가 들어선 뒤 현재까지 중화민국 헌법 체제 하에 시스템이 운영되고 있다.
대만의 헌법 1조 1항은 ‘중화민국’으로 시작한다.
“중화민국은 삼민주의에 기초한, 민유(民有), 민치(民治), 민향(民享)의 민주 공화국이다.” (中華民國基於三民主義,為民有民治民享之民主共和國。)
국민당의 전신은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흥중회(興中會), 화흥회(華興會), 광복회(光復會) 등 여러 조직이 모여 1905년 일본 도쿄에서 탄생했다. 흥중회, 화흥회, 광복회는 각각 중국 광둥(廣東), 후난(湖南), 저장(江浙)성에서 성립됐다. 쑨원(孫文)은 혁명 달성과 공화국 설립을 위해 16개 강령을 내놨다.
중국동맹회는 중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의 중국인(화교)을 잇는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 조직은 청나라를 전복시키고 공화국을 설립하기 위해 창설됐다. 중국동맹회와 쑨원이 구상한 것은 중화민국정부 조직과 일치한다. 총리 하에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로 나뉘고 실제적으로 3권 분립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동맹회 [인터넷 캡처] |
이에 앞서 청나라는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로 불안정한 형국이었다.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광서제(光緖帝)는 서태후(西太后)에게 휘둘리는 허수아비나 나름없었다. 이에 정치적 개혁 운동인 무술변법(변법자강운동)이 캉유웨이(康有爲)에 의해 일어났다.
광서제는 이를 지지했다. 캉유웨이는 보국회를 조직해 변법 운동을 확장시켜 가고자 했다.
많은 정치 세력들이 보국회를 지지하자 서태후는 이를 해산시켜버렸고, 캉유웨이의 동생 및 관련 인사들을 처형시켰다. 강서제는 1898년 퇴위당했다. 캉유웨이는 결국 일본으로 망명했다.
서태후 [인터넷 캡처] |
중국동맹회는 쑨원(손중산, 孫中山), 쑹자오런(宋教仁), 황싱(黄興), 황위안수(黄元秀), 차이위안페이(蔡元培)가 주류를 이루며 조직을 이끌었다. 중국동맹회는 1905년 11월 기관 언론지 '민보'를 창간해 혁명 선전에 힘썼다.
삼민주의로 널리 알려진 쑨원은 혁명운동을 시작하기위해 1894년 흥중회를 조직하여 무장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일본으로 망명한 뒤 중국동맹회의 핵심 인물로 자리하지만 얼마 못가 일본에서 추방 당하여 베트남으로 이주했다. 그는 혁명을 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세계 여러 곳을 누비며 혁명을 설파하며 정치자금 마련에 힘썼다.
1906년 이후 중국동맹회는 내분이 끊이질 않았다. 저마다 개인의 갈등이 깊어 갔고, 정치적 이론 및 혁명방략에 대한 의견 차이 등은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켰다. 또한 일련의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며 이러한 문제는 더욱 가중됐다. 언론 역할을 하던 민보도 1908년 10월 폐간됐다.
중국동맹회는 청을 전복시키기 위해 봉기를 조직, 중국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06년부터 동맹회는 지방회당과 연합해 동맹을 일으켰다. 1906년 12월 핑류리(萍瀏醴) 봉기, 1907년 5월 황강(黃岡)봉기, 1907년 6월 치뉘후(七女湖) 봉기, 1907년 9월 친롄팡청(欽廉防城) 봉기, 1907년 12월 전난관(鎮南關) 봉기, 1908년 3월 친롄상쓰(欽廉上思)봉기, 1908년 4월 윈난허커우(雲南河口)봉기, 2010년 2월 광저우신군(廣州新軍起義), 1911년 4월 27일 황화강(黃花崗)봉기 등이 중국동맹회가 일으킨 봉기로 꼽힌다.
그중 1906년 핑류리 봉기는 동맹회가 창설된 후 처음 대규모로 발생한 무장봉기다. 태평천국 이후 주국 남부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가장 큰 반청혁명 투쟁이다. 1만 명 이상 희생됐다. 1911년 황화강 봉기에 참가, 목숨을 희생한 이들은 동맹회에서 중추적 멤버로 알려져 있다.
쑨원과 혁명 방식을 달리하는 이들은 반대하며 내분이 끊이질 않았고, 급기야 쑹자오런이 이끈 중국동맹회 중부총회가 1911년 7월 상하이에서 창설됐다. 이는 쑨원이 빠진 중국동맹회가 역할을 다하지 못하자 쑹자오런이 재건한 것이다.
당시 청나라는 철도 건설을 계획 중이었는데, 철도를 국유화하고자 했다. 지방 세력가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이를 반대하는 운동인 보로운동(保路運動)이 발발했다.
그 배후에는 혁명 세력들이 있었고, 이어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쑹자오런의 중국동맹회는 우창에서 무장봉기 준비에 들어 갔다. 동맹회는 후베이성의 혁명단체와 손잡고 신해혁명의 시발이 된 우창봉기(武昌蜂起)를 1911년 10월 10일 일으켰다. 이어 군정부를 수립한 뒤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우창봉기 중 의용군 포병 |
우창봉기 발발 뒤 청은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권력을 위임해 혁명군 진압을 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청은 혁명군에게 줄곧 패배를 거듭했다. 산시성(山西省), 화중(華中), 화남(華南) 지방 등 13성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청사진이 발표됐다.
1911년 12월 2일 혁명군이 난징을 점령했다. 각지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새 정부 구상에 들어갔지만 좀처럼 의견들이 좁혀지지 않았다. 사공은 많았지만 선장이 부재한 탓이었다.
1911년 12월 25일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계를 돌던 쑨원은 중국으로 돌아왔고, 29일 그는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다.
이듬해 1월 1일 쑨원은 난징을 수도로 한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것이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이는 중국 대륙에서 2000년 간 전해 내려온 봉건 통치를 종식시킨 것이다.
임시대총통이 된 쑨원은 국호를 중화민국, 1912년 1월 1일을 '민국'의 원년으로 삼았다. 이 원년은 현재까지 대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신해혁명 후 중국동맹회는 국민당으로 조직개편을 한다. 그리고 다시 이 조직은 중화혁명당으로 개명했다가 1919년 중국국민당으로 개명한 뒤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