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베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느린 동물을 만나다
'나무늘보'가 가르쳐준 '느림’
[대만은 지금 = 류정엽(柳大叔)]
얼마 전에 타이베이시립동물원에 다녀왔다. 겨울에 동물 구경은 처음 해보는 것 같다. 겨울에 대만 동물원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어떻게 겨울을 나고 있을까? 그냥 궁금했다.
일제시대인 1914년 개장한 것으로 알려진 타이베이동물원은 무자(木柵)선이라고 불리는 타이베이 MRT(지하철) 브라운 라인을 타고 갈 수도 있고, 시내버스로도 이곳에 갈 수 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조금 외곽에 위치해 있다. 인근에는 대만에서 손꼽히는 명문대 국립정치대학교가 있다.
타이베이동물원은 상당히 크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동물원이라고 한다. 400여 종의 동물들이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모두 7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기호에 따라 보고 싶은 동물들을 찾아가 보는 방식이다. 대만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곳은 단연 판다관이다.
교통카드인 요요카드를 사용해 60대만달러(2400원)를 내고 동물원에 들어서자 그 앞에서 판다관 입장권을 나눠 주고 있었다. 판다 관람은 표를 받은 뒤 지정된 시간에만 관람이 가능하다. 사람들이 길에 줄을 늘어서는 것이 보통이므로 나중에 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코로나19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은 덕에 판다관 앞에는 여느 때처럼 줄이 길게 늘어섰다.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인파에 떠밀려 이들을 구경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마냥 신난 대만인들을 보면서.
이곳을 빠져나온 뒤 다른 전시구역으로 이동하면서 슬로 여정을 즐길 수 있었다. 마치 뉴욕의 센트럴파크 동물원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여유 있게 가족들과 함께 거니는 이들, 여자 친구의 인생 샷을 위해 용쓰는 남자들 등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적지 않은 외국인들도 보였다.
한 전시관에 들어섰고, 귀여운 동물들이 겨울을 나고 있는 모습을 감상했다. 대만의 겨울이래 봐야 한국만큼 춥지는 않지만, 습도가 높고 실내에 난방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뼛속이 시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관람 도중 열대우림에서나 볼 수 있다는 '나무늘보'가 능청스럽게 관람객들 사이를 느릿느릿 오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느려 터졌다는 나무늘보는 관람객들을 위한 통로 변에 대롱대롱 위험하게 매달려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무늘보는 관람객들의 시선이 익숙한 듯 천연덕스럽게 관람객들을 바라보다가 이들이 시선을 뒤로한 채 난간 외벽을 타고 유유히 자기 갈 길을 갔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느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구경을 이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걷고 있던 통로 바깥에서 나무늘보의 모습이 보였다. 이 녀석은 잠깐 나를 바라보더니 느릿느릿 관람객 통로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어 나를 향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나무늘보는 난간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눈을 살며시 감은 뒤 사색에 잠겼다. 포즈를 취한 것일 수도 있겠거니 했다. 느려 터져도 저렇게 느릴 수 있을까? 이 녀석이 게을러서 느린 것은 아닐 것이다. 느리고 싶어서 느린 것도 아닐 것이다.
이내 사람들이 휴대폰을 들고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와~ 나무늘보 좀 봐", "카메라를 즐기고 있어", "사진 찍어달래"라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휴대폰을 들고 나무늘보 바로 앞까지 갔다.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휴대폰을 녀석의 앞에 들이댔다. 그러나 이 녀석은 느릿느릿 포즈를 취했다. 마치 "잘 찍어 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빨리 좀"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 나는 성격이 매우 느긋한 편이지만 나무늘보 앞에서는 영락없이 급하디 급한 인간이었다. 분명, 동물원에서 느린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음에도 나무늘보를 보고는 참지 못했다. 동물원 폐장 시간이 다가와서, 다른 동물을 보기 위해서 무심코 이런 말을 뱉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뱉고는 갑자기 나무늘보에게 미안해졌다. 미안함도 잠시, 한 동물원 직원이 뒤에서 "빨리 앞으로 가세요. 다음에 다시 오시면 이러한 나무늘보를 또 보실 수 있어요."라는 말이 내 뒤에서 들려왔다.
느리고 빠름은 '시간'과 결부된다. 인간에게 '시간'이란 뭘까. 나무늘보를 보면서 '급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시간에 속박된 인간은 시간의 노예일까. 이러한 시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소위, 자본주의, 무한경쟁시대를 살고 있다고 세뇌되어온 우리에게 '느림'은 향유해서는 안 되는 '사치'인 것일까.
시간을 주체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있는 우리지만 계획과 일정이라는 것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잡고, 계획을 세우고 시간관리를 잘해야 한다며 자신을 팍팍함으로 몰아넣은 건 아닌가 생각해봤다.
타이베이동물원에서 나무늘보를 본 뒤, 느림을 즐긴다는 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종의 자기 해방 같은 가치를 지닌다. 그저 물 흐르듯 나 자신을 시간에 맡기는 것이다. 계획과 실천에 익숙해진 우리지만 적어도 그 계획에 '느림'을 추가해 생활해 보는 건 어떨까. 어떤 이들은 '느림'을 '게으름', '더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느림'의 정확한 기준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소소한 삶을 일정 부분 지향한다면 자기 성찰 등을 통해 정신적으로나마 조금 더 낙관적이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요즘 정신이 하나도 없어"라는 말을 수시로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한번은 '느림'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은 어떨까. 나 자신을 찾는 삶은 '여유'를 찾았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행복도 여기서 비롯된다. 매년 유엔이 발표하는 행복지수에서 우리나라는 30여 년 간 OECD 국가 34개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오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와 대만의 행복도를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느껴진다. 유엔 지속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표한 2017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대만은 33위, 한국은 56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