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광저우 황화강 72열사의 묘 [위키피디아 캡처] |
[대만은 지금 = 류정엽(柳大叔)]
3월 29일은 대만의 청년절이다. 청년절이라고 하면 흔히 청년들을 위한 날로 여겨지기 마련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중화민국 건립까지의 혁명 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1948년 장제스(蔣介石) 총통은 이날을 '혁명선열기념일'(革命先烈紀念日)로 선언했다. 1943년 3월 29일 중국국민당 삼민주의청년단은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광저우(廣州) 황화강(黃花崗) 봉기 순교자 72명을 기념하기 위해 이날을 청년절로 지정했다.
당시 이들은 1919년 5월 4일 발생한 대규모 학생운동인 5.4운동보다 황하강 봉기가 더 큰 업적을 거두었다고 판단했다. 5.4운동은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운동으로 베이징 톈안먼(천안문)에서 3천여 명이 모여 시작됐다.
황하강 봉기는 제3차 광저우 봉기라고도 알려져 있다. 황하강 봉기는 현 대만의 국민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가 일으킨 사건이다. 1910년 11월 13일 쑨원(손문, 孫文)의 계획 하에 황싱(黃興)이 이 봉기를 이끌었다.
황씽은 이듬해 1월 홍콩으로 건너가 봉기를 위한 부서를 설립했다. 황싱은 부사령관으로, 자오성(趙聲)은 총사령관에 올랐다. 이들은 4월 13일 봉기를 일으키기로 했으나 무기 등이 마련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중국동맹회 소속 원성차이(溫生才)는 1911년 4월 8일 광저우 장군 푸치(孚琦)를 총으로 척살했다. 봉기는 4월 27일로 연기됐다. 이날은 당시 음력으로 3월 29일이었다.
황싱은 4월 23일 광저우로 넘어갔다. 봉기 본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계획은 새로운 군대, 경찰 등과 협력하여 광저우시를 점령하고 혁명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보가 새어 나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예정대로 봉기는 4월 27일에 시작됐다. 하지만 원래 계획 상의 공격 루트 4곳에서 공격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