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대만인 차오중닝(曹仲寧)]
중화상가. 한 때시먼딩의 상징이었던 이곳. 나이가 좀 있는 대만인들에게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곳. 중화상가는 어떤 곳이었을까?
시먼딩(西門町)의 번화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화상가는 시먼딩(西門町)의 번화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1992년에 철거한 후에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건물은 심지어 1990년대생조차 본 적이 없다. MRT가 아직 건설되지 않고 철도가 현재의 중화로 1단(中華路一段)을 달리고 있었을 때, 중화상가는 아시아 최대의 종합상가 건물이었다. 중화상가는 '대만의 아사쿠사'라고 불리는 시먼딩의 지난 세기말의 휘황찬란한 시대를 써 내려갔을 뿐만 아니라 타이베이 토박이의 지난 30년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정부가 무허가 건축물을 정돈하기 위해
처음에 정부가 무허가 건축물을 정돈하기 위해 시먼딩에서 중화상가를 영건하기로 결정했다. 1949년에 국민당 정부를 따라서 대만으로 옮긴 사람들은 시먼 근처의 철도길 옆에서 발걸음을 멈추고서 오점을 벌이고 대나무 텐트를 치고 살았다. 시간이 지나서 한 줄의 길이는 1km에 달하며, 가구는 1661의 무허가 건축물 지대가 형성되었다. 1960년 7월 정부는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옛터를 철근 콘크리트 건물인 중화상가로 개축했다. 1961년 8개 동이 이어진 3층의 건축물이 탄생했고, 이들은 충(忠), 효(孝), 인(仁), 애(愛), 신(信), 의(義), 화(和), 평(平)으로 이름을 갖게 됐다.
'상가건물'이 '주상복합건물'로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된 후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 중화상가에서 무허가 상점을 운영하던 상인들이 가게 하나만 임대한 채 사는 곳을 임대하지 못했던 것. 결국 상인 가족들은 가게에서 살게 됐다. 결국 상가의 용도는 '주상복합건물'로 변경됐다. 중화상가를 완공한 지 2년 후인 1963년 자료에 따르면, 8개 동 총 1644가구, 평균 약 2평 남짓한 가게 공간은 단 863개의 상점만 운영되고 나머지는 상점이 아닌 주거공간이 되었다.
서민적인 모습을 담다
이런 상황에서 중화상가의 모습은 점점 복잡해졌다. 많은 아이들이 건물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건물에 넌 빨래들은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이런 서민적인 모습은 중화상가를 상업 공간일 뿐만 아니라 3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 되었다.
도시재건을 위해 철거되다
80년대, 타이베이 동구(東區)를 중심으로 한 업무지구 등이 등장하고, 타이베이의 도심으로 급성장하게 되면서 원도심인 완화(萬華), 시먼(西門), 다다오청(大稻埕)은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노후화된 중화상가의 안전 문제까지 지속해서 거론되었다. 그리고 타이베이블루라인인 MRT 반난선 (板南線) 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 타이베이시는 철도 지하화공사를 추진, 1992년 10월에 철거되었다. 시먼딩의 번화를 대표하는 건물이 역사가 되었다. 이 자리는 가로수길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