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지금 = 대만인 양영문(楊詠文) 기고] 2015년 2월 13일 가오슝의 어느 육교 밑에서 10NTD만 받고 한 끼 식사를 팔면서 평생을 형편이 넉넉치 못한 이들을 도운 주옥녀(朱玉女) 할머니가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만 펑후(彭湖)에서 태어난 주옥녀 할머니는 16살 때 남편이랑 가오슝으로 이사했다. 할머니는 남편과 젊었을 때 사업을 했다. 처음에 전선 사업했다가 가오슝항구에서 컨테이너 관련 사업체를 경영했다. 그때 주 할머니는 힘든 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면서 저렴한 도시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도시락 하나에 15대만달러 였지만 할머니가 판 도시락은 하나에 8원에 불과했다.
주 할머니 부부는 자식 세명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다 커서 독립한 후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육교 아래에서 도시락을 싸게 판매했다. 노동자뿐 아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도시락 하나에 10원만 받고 팔았다.
할머니는 이들을 든든히 먹이기 위해 반찬을 고기와 두 가지 이상의 야채를 담았다. 주 할머니 계속 이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집을 7 채나 팔아치웠다. 도시락을 만들 자금은 집을 팔아도 모자르게 됐고, 이를 해운, 여행사업을 하는 큰 아들이 다 맡기로 했고, 할머니의 딸도 8년간 곁에서 도와줬다.
이렇게 할머니는 50년에 걸쳐 10대만달러 도시락을 팔아왔다. 처음에는 하루 세끼 다 그렇게 팔았지만 여든살이 넘어가면서 건강에 이상을 느낀 할머니는 점심에만 도시락을 팔았다. 이 소식이 여기저기 알려지면서 수많은 대만언론들은 할머니를 주목했다. 가오슝 시장은 할머니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2001년에 할머니에게 ‘도시의 영웅’이라는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정치인과 연예인 등 3천여 명은 장례식장을 직접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이렇게 평생 봉사하고 살다 고인이 된 주옥희 할머니가 만든 사랑의 도시락 이야기는 아직까지 많은 대만인들이 기억하고 있고, 할머니의 따뜻한 도시락으로 말미암아 타인을 돕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주옥녀 할머니 / SET |
대만 펑후(彭湖)에서 태어난 주옥녀 할머니는 16살 때 남편이랑 가오슝으로 이사했다. 할머니는 남편과 젊었을 때 사업을 했다. 처음에 전선 사업했다가 가오슝항구에서 컨테이너 관련 사업체를 경영했다. 그때 주 할머니는 힘든 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면서 저렴한 도시락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도시락 하나에 15대만달러 였지만 할머니가 판 도시락은 하나에 8원에 불과했다.
할머니의 도시락을 사러온 사람들 / 동영상 캡처 |
주 할머니 부부는 자식 세명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다 커서 독립한 후에도 할머니는 여전히 육교 아래에서 도시락을 싸게 판매했다. 노동자뿐 아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도시락 하나에 10원만 받고 팔았다.
할머니는 이들을 든든히 먹이기 위해 반찬을 고기와 두 가지 이상의 야채를 담았다. 주 할머니 계속 이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집을 7 채나 팔아치웠다. 도시락을 만들 자금은 집을 팔아도 모자르게 됐고, 이를 해운, 여행사업을 하는 큰 아들이 다 맡기로 했고, 할머니의 딸도 8년간 곁에서 도와줬다.
자료사진 / 인터넷 캡처 |
이렇게 할머니는 50년에 걸쳐 10대만달러 도시락을 팔아왔다. 처음에는 하루 세끼 다 그렇게 팔았지만 여든살이 넘어가면서 건강에 이상을 느낀 할머니는 점심에만 도시락을 팔았다. 이 소식이 여기저기 알려지면서 수많은 대만언론들은 할머니를 주목했다. 가오슝 시장은 할머니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2001년에 할머니에게 ‘도시의 영웅’이라는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가오슝 시정부는 할머니에게 '도시의 영웅'이라는 훈장을 수여했다. |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정치인과 연예인 등 3천여 명은 장례식장을 직접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이렇게 평생 봉사하고 살다 고인이 된 주옥희 할머니가 만든 사랑의 도시락 이야기는 아직까지 많은 대만인들이 기억하고 있고, 할머니의 따뜻한 도시락으로 말미암아 타인을 돕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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